10년 넘게 국립창극단에서 함께 울고 웃었다. ‘창극 아이돌’로 불리며 공연마다 주역을 도맡는 간판 스타로 활동한 소리꾼 배우 김준수(35)와 유태평양(34)이 21~23일 서울 마포아트센터 창극 ‘살로메’(연출 김시화) 공연을 함께한다. 두 사람이 올해 초 창극단을 나와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뒤 처음 같이 서는 무대다. 서울 종로구의 연습실 근처 카페에서 만난 두 사람은 무대 밖에서 만나도 여전히 빛이 나는 듯하다.
‘살로메’는 원래 계부 왕을 꼬드겨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요부 살로메에 관한 2000년 전 신약성서 속 이야기.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극작·연출가 고선웅이 파격적으로 재해석한 대본을 썼고, 2024년 초연부터 창극 팬들의 열광적 지지를 얻으며 공연을 거듭해왔다. 김준수가 아비에게 세례자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의붓딸 ‘살로메’, 유태평양이 의붓딸 살로메에게 집착하는 이스라엘 왕 ‘헤로데’를 맡는다.
모든 게 ‘툭’ 끊어지는 무대 위 몰입
절친인 두 사람은 “살로메가 관능적인 춤을 추며 유혹하고, 헤로데가 조바심을 내며 살로메에게 매달리는 장면들을 진지하게 연습하다가도, 눈만 마주치면 웃음이 터지기도 여러 번”이라고 했다. 유태평양은 “하지만 무대에 올라 몰입하면 모든 게 툭 끊어지는 듯한 그런 순간이 온다”고 했다. “친한 친구 같던 얼굴은 사라지고, 평소의 친분 같은 걸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서로가 살로메와 헤로데로만 보이는 거예요. 배우에게는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짜릿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죠.”
창극단을 나온 뒤 김준수는 연극 ‘칼로막베스’와 뮤지컬 ‘서편제’에 출연했고, 유태평양은 창극단 ‘효명’의 작창과 국립극장 여우락 페스티벌 음악감독을 맡았다. 김준수는 “일찍 일어나 출근하는 ‘직장인’ 압박을 겨우 벗어나나 했는데 오히려 더 일찍 눈이 떠져 억울하더라”며 웃었다. 유태평양은 “늦잠 자지 않는 규칙적 생활을 목표로 했는데, 식단 조절하며 러닝도 하고 운동량도 늘렸더니 그새 20㎏이나 빠졌다”며 멋쩍어했다. 그러고 보니 유태평양은 정말 몰라보게 날씬해졌다.
연극·뮤지컬로, 작창·음악감독으로
김준수는 창극단에서도 ‘패왕별희’의 ‘우희’, ‘트로이의 여인들’의 ‘헬레네’ 등 여성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 그는 “또 여성 역할이라니 처음엔 주저했지만, 들여다볼수록 살로메에게 필요한 건 여자를 연기하는 남자가 아니라 비뚤어진 질투와 집착 때문에 파멸로 치닫는 에너지 그 자체더라”고 했다. 유태평양도 “인간성을 뛰어넘는 집착과 욕망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게, 불편하고 껄끄러워 보이게 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였던 것 같다”고 했다.
살로메가 “어떤 소원도 들어주겠다”는 아버지 헤로데의 말에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 영원히 소유하기 위해 보여주는 ‘일곱 베일의 춤’은 서양에서 스트립댄스의 시초라는 속설도 있다. 우아한 선이 중요했던 패왕별희 속 우희의 춤과 달리, 동물적 관능이 필요한 춤은 김준수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뱀처럼 칭칭 감는 느낌이랄까요. 난생처음 힘차게 골반을 튕기느라 엉덩이에 담 걸린 적도 있다니까요. 명치 쪽까지 단단히 채우는 코르셋을 처음 입어봤어요.” 그는 “이젠 엉덩이로 발림(소리꾼의 몸짓)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깊이 들어갈수록 정상적 사랑을 받지 못해 생긴 살로메의 결핍과 집착과 사랑을 구분 못 하는 심성을 가엾게 여기게 되더라”고 했다.
“최예림 배우, 상상 그대로의 진짜 살로메”
김준수의 살로메는 같은 역할로 더블 캐스팅된 소리꾼 배우 최예림이 “그에게 관능을 배웠다”고 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김준수는 “아니다. 누나(최예림)가 진짜 살로메”라며 손을 저었다. “누군가 대본을 읽고 상상한다면 외모도 체격도 무대 위에서 뿜어내는 분위기도 최예림 배우가 그대로 살로메예요. 배우로서 가진 것들이 캐릭터에 너무 잘 어울려요. 기대해도 좋으실걸요?” 유태평양도 “연습하는 모습을 보는데 내가 생각했던 살로메의 이미지와 정말 비슷해 놀랐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의붓딸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헤로데 왕은 어쩌면 살로메보다 더 ‘막장’인 인물이다. 유태평양에게 헤로데는 “강압적으로 복종을 요구하다가도 거절당할수록 깊어지는 욕망에 제정신이 아닌 듯 매달리는, 일방적 직진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뭐든 할 수 있는 최고 권력자인 왕인데도 제 안에 엄청난 불안이 쌓여 있고, 살로메에게 거절당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변해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받으면서는 그 위에 알 수 없는 두려움까지 뒤섞이면서 폭주하는 미치광이가 돼 가는 거죠. 그 과정을 점층적으로 설득하려 노력합니다.”
김준수는 “결국 헤로데는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똘똘 뭉친 나약한 인물이지만, 살로메는 솔직하고 직선적이어서 스스로를 갉아먹어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내면이 되게 강한 여자”라고도 했다.
소리꾼 한계 시험하며 몰아치는 폭발적 고음
창극 ‘살로메’는 출중한 소리꾼 배우이기도 한 정은혜가 작창을 맡았다. 전통 소리에서 잘 쓰지 않는 반음계가 난무하고, 소리꾼들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음이 액션 영화처럼 몰아친다.
유태평양은 “보통 창극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에너지를 꾸준히 투입해야 한다. 캐릭터마다 부여된 리듬, 고속 회전하며 숨 막힐 듯 몰아치는 작창가의 의도를 제대로 표현하려 배우들 모두 무던히 노력한다”고 했다. “헤로데가 ‘요한의 목을 따라!’고 노래하는 대목에선 고음이 거의 가수 김경호 님의 전성기 때 음역대까지 올라가요. 무대에서 실수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다가도 꼭 제대로 해내고 말겠다는 도전 의지도 생깁니다.” 김준수는 “누나(정은혜)에게 세례 요한의 목을 딸 건지 이 어려운 노래로 소리꾼들 목을 딸 건지 양단간에 결정하라고 농담한 적도 있다”며 웃었다. “나중에 본인이 콘서트에서 직접 불러보더니 ‘너희들 이거 어떻게 했냐. 진짜 힘들더라’며 음을 좀 낮춰주더라고요, 하하.”
“무대 위 독보적 아우라” “한계 모르는 예술 세계”
유태평양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김준수만의 무대 위 독보적 아우라”가, 김준수는 “다양한 배움과 예술 경험에서 나오는 유태평양의 한계를 모르고 도전하는 자유로움과 독창적 예술 세계”가 서로 부럽다. 김준수는 “판소리를 내 운명이자 숙명이라 여기며 무엇을 하든 국악과 우리 소리를 늘 중심에 놓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갈 생각”이지만, 유태평양은 “재즈부터 록까지 하고 싶은 거 다 해본 여우락 공연처럼 판소리에서 출발해 콘텐츠로 사용하면서 내가 듣고 싶은 음악, 더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는 게 목표”다. 유태평양은 “어려운 한자어로 된 판소리 다섯 바탕을 다 쉬운 우리말로 풀어서, 누구나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각색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고 했다.
국립창극단의 잘 만들어진 시스템 밖으로 나와 민간 창작 창극을 무대에 올리고 흥행시키는 것은 새로운 도전. “뮤지컬처럼 여러 공연장에 창극이 한꺼번에 올라가 서로 다른 포스터들이 휘날리듯 내걸리고, 다채로운 창작이 창극이 더 많이 나오길” 바라는 건 두 사람이 한마음이다. 유태평양은 “공연의 성공은 어쩌면 확률이고, 즐기는 사람뿐 아니라 국악인의 길을 걷는 사람도 늘어나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시도가 많아질수록 성공 사례도 더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김준수는 “창극 ‘살로메’가 민간 단체의 성공 사례가 돼서 더 많은 창작자가 창극에 뛰어드는 계기, 어떤 디딤돌의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라고 있다”고 했다.
장소 협조: 티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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