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 연주를 마친 피아니스트 선율이 커튼콜 뒤 다시 무대에 나타났다. 손에는 마이크가 들려 있었다. "들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개 이 작품은 연주자의 도전과 성취의 측면에서 언급되곤 하지만 선율은 달랐다. 기교의 정점을 보여주는 이 음악을 연주자의 도전만이 아닌 관객의 인내와 집중이 함께 필요한 여정으로 봤다. 평소 스스로를 소극적이라 거듭 강조해 온 청년 피아니스트의 고백을 생각하면, 6월 4일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 무대 위에서의 이러한 대담함과 다정함은 묘한 반전이었다. 실제로 그는 공연 이튿날 가진 인터뷰에서 "연주자 스스로를 위해 도전하는 과정에서 관객은 희생하는 건데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날의 무대는 한 젊은 피아니스트의 취향과 음악관이 오롯이 담긴 공연이었다. 과시보다 음악, 기교보다 이야기가 먼저였다.
이번 공연은 프랑시스 풀랑크의 '15개의 즉흥곡'과 프란츠 리스트의 '12개의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으로 구성됐다. 프랑스 근현대 작품과 낭만주의 거장의 대표작을 나란히 배치한 구성을 넘어 서로 다른 두 세계를 통해 자신의 음악적 관심사를 드러낸 프로그램이었다.
전반부의 풀랑크에 대해 그는 프로그램북에서 놀이공원 퍼레이드에 비유했다. 각각 1~3분 남짓한 짧은 곡들이지만 자신에게는 연속된 하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고 적었다. 실제 연주도 그 설명을 닮아 있었다. 각 곡의 개성을 또렷하게 살리면서도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냈다. 10곡을 마친 뒤 잠시 퇴장해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11곡부터 이어간 구성은 하나의 막이 전환되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작품 번호상 자연스러운 구분이었지만 단순한 호흡 조절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화려한 축제의 낮이 지나고 퍼레이드가 끝난 뒤의 고요한 저녁으로 접어드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짧은 소품의 나열이라기보다 여러 장면이 이어지는 한 편의 서사처럼 들렸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우아하고 서정적인 선율과 날카롭고 해학적인 유머 감각이 살아 있는 풀랑크의 개성이 짙어졌다. 서로 다른 표정을 지닌 곡들은 느슨하게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흐름 속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선율은 프로그램북에 적어 놓은 자신의 감상이 결코 수사가 아니었음을 연주로 증명했다.
후반부의 리스트는 더욱 인상적이었다. '초절기교 연습곡'은 제목부터 기교를 전면에 내세운다. 실제로 많은 연주자들이 이 작품을 통해 압도적인 기술과 에너지를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선율의 관심은 속도나 위력보다 각 곡이 품고 있는 이미지와 정서에 있었다.
섬세하게 조절된 페달링은 음향을 맑게 유지했고, 복잡한 음형 속에서도 주된 멜로디는 또렷하게 살아났다. 거대한 구조를 밀어붙이기보다 곡마다 다른 풍경을 그려 나가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이날의 리스트는 화려함보다 서정성이 먼저 다가왔다. 흔히 4, 5, 8, 10번처럼 거칠고 빠른 곡에 집중하게 되지만 선율의 ‘초절기교 연습곡’ 연주에서 귀에 꽂히는 음악은 낭만적 분위기의 3, 6, 9번 등이었다. 특히 잔잔하게 시작해 풍성한 화성의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11번 ‘저녁의 선율’이 인상적이었다. 연주자 스스로도 "처음으로 제목 그대로 저녁의 정서를 느끼며 연주한 무대였다"고 돌아봤다. 화려한 기교보다 시적인 상상력을 발휘한 ‘초절기교 연습곡’의 이러한 해석은 그의 음악관과도 연결된다. 독일 유학을 준비하다 한 달 만에 프랑스로 방향을 틀었던 그는 그곳에서 음악뿐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태도까지 크게 바뀌었다고 말한다. 정답은 하나가 아니며 서로 다른 방식이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과거에는 자신의 자유분방함을 단점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그것이 자신의 색깔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연주에는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조급함이 없었다. 미국 지나 바카우어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서울국제음악콩쿠르 1위, 류블라나 페스티벌 국제 콩쿠르 2위 등 화려한 성과를 거뒀지만, 정작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작품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발견하고 전달하는 일인 듯 보였다. 스스로를 작곡가의 말을 전하는 “통역사”라고 설명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날 선율은 리스트를 정복한 피아니스트라기보다 리스트 안의 시적 풍경을 들려준 이야기꾼에 가까웠다. 공연 후 그는 자신을 "알 수 없는 연주자"라고 표현했다. 어떤 음악가가 될지 아직은 스스로도 규정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이날 무대만큼은 그 말이 불확실함보다 가능성에 가깝게 들렸다.
Copyright©Mapo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