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타이즈 대신 꼿꼿한 갓을 쓰고, 튀튀 대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도파민’ 넘치는 기세로 춤을 추는 발레리나와 발레리노가 있다?!
파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심술쟁이 놀부는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뽐내며, 거만하게 곰방대를 바닥에 탁탁 두드리고. 조선시대에는 남성만 쓸 수 있었던 흑립을 여성 무용수들이 쓰고 힘차게 움직인다.
서양의 고전 무용인 발레에 조선시대 모자 ‘갓’을 끼얹었는데, 고전적이 아니라 ‘힙’한 무대가 완성됐다. 윤별발레컴퍼니의 화제작 ‘갓(GAT)’이 28,29일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을 찾는다. 공연을 위해 연습이 한창인 윤별발레컴퍼니의 연습실을 4일 찾았다.
화제의 시작, ‘섹시 놀부’
▲(사진) 발레 <갓(GAT)> 中 '정자관' 연습장면.
‘갓’은 윤별발레컴퍼니가 처음으로 만든 창작 작품이다. 그런데 첫 무대부터 매진이 됐는데, 시작은 작품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메이킹 필름이었다. 작품 중 심술궂은 놀부를 나타내기 위해 정자관을 쓴 발레리노 강경호가 등장하는 장면이, 소셜 미디어에서 퍼지고 하루만에 티켓이 다 팔렸다.
이 때 ‘섹시 놀부’라는 별명을 얻은 강경호는 경연 프로그램 ‘스테이지 파이터’에 출연하며 더 유명해졌다. ‘스테이지 파이터’에 출연한 김유찬, 정성욱도 ‘갓’의 원년 멤버이고, 스페인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출신 이은수 등 실력파 무용수들이 함께한다.
여기에 넷플릭스 시리즈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유행하며 검은 갓을 쓴 발레리노 5명이 등장하는 장면 ‘남흑립’이 대목이 ‘사자보이즈 실사판’이라며 다시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된다. 이렇게 여러 가지 흥행 요소가 겹치면서 ‘갓’은 2025년 전국 투어까지 평균 객석 점유율 99%를 기록했다. 올해 5월에는 태국과 베트남으로 해외 공연을 떠날 예정이다.
연습실에 걸린 ‘방충망 갓’

▲(사진) 발레 <갓(GAT)>의 박소연 안무가(왼쪽), 윤별 예술감독(오른쪽)이 공연에 등장하는 다양한 '갓'과 함께 사진촬영하고 있다.
이렇게 소셜 미디어에서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져서 쉽게 얻은 성공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갓’이 무대에 오르기 까지는 오랜 준비와 우여곡절이 있었다. 서초구 한 빌딩 지하에 있는 윤별발레컴퍼니의 연습실에 들어서자, 조명등으로 쓰이는 ‘갓’이 보였다.
윤별 대표는 “처음에 원하는 모양에 가격도 적당한 갓을 구할 수 없어 박소연 안무가의 아버지께서 방충망을 겹쳐 글루건으로 붙여서 만들어 주신 소품”이라며 “원래 저희 연습실은 굉장히 허름한 곳이었는데, 지금의 이곳으로 올 수 있게 만들어준 처음의 ‘갓’을 잊지 말자는 마음에서 걸어 놓고 있다”고 말했다.
연습실은 윤 대표의 반려견인 시베리안 허스키 ‘잭슨’이 반겨주고, 무용수들이 바닥에 앉아 소품을 만지작거리며 고된 연습에 지친 누군가는 벌러덩 누워 잠을 청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윤 대표는 “’갓’을 함께하는 무용수들 대부분은 윤별발레컴퍼니의 원년 멤버이고, 저의 중,고등학교 친구들도 많다”며 “회사는 친구들과 함께 만든 ‘왕국’”이라고 했다.
‘파격’과 ‘도파민’ 넘치는 안무

▲(사진) 발레 <갓(GAT)> 中 '주립' 연습장면.
시작되자 무용수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윤별 대표는 함께 리듬을 타기도 하면서 ‘매의 눈’으로 안무 하나하나를 살폈다. 여성의 강함과 멋을 표현한 군무 ‘여흑립’부터 무관만 쓸 수 있었던 주립(빨간 갓)을 발레리나가 쓰고 절도있는 춤을 선보이는가 하면, ‘패랭이’ 장면에서는 잠시 짐을 내려놓고 춤을 추는 상인의 쾌활한 흥이 무대를 압도했다.
‘문인화’의 ‘수묵’은 두 무용수가 합을 맞춰 고난이도의 안무를 선보이며 선비의 예술을 표현해냈다. 마지막 ‘갓일’에서 군무는 갓의 선 하나하나가 꼬이고 엮이는 과정을 표현했는데, 이 작품으로 동고동락하고 있는 윤별발레컴퍼니 무용수들의 끈끈한 관계를 보여주는 듯했다.
여러 장면들을 지켜보면, 이 작품이 ‘바이럴’하게 퍼진 이유가 자연스레 느껴진다. ‘갓’을 만든 박소연 안무가는 독일 드레스덴에 머물던 시절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을 보면서 이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그는 “유럽인들이 ‘갓’을 신기해하는 것을 보고, ‘갓을 쓴 발레리나’로 꼭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탄생한 장면이 ‘여흑립’”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갓’과 ‘발레리나’라는 서로 맞지 않는 요소를 결합하면서 시작한 ‘파격’이 자연스레 눈길을 끌게 한다. 윤별 대표는 “사실 조선시대 여러 모자들은 특정 신분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따르지 않고 비틀었다”며 “여자도 흑립을 쓸 수 있고 역할만 맞다면 젠더프리 캐스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제가 가장 많은 영감을 받은 건 ‘정자관’인데, 여기도 비틀기가 있어요. 정자관을 쓴 대감들은 뛰지도 않고 거칠지도 않다고 하는데, 저희 작품에서는 ‘정자관’ 장면이 제일 비트가 빠르고 역동적이에요. 또 ‘주립’은 무관만 쓰는데 여성 무용수가 쓰고 있고 남성 무용수들이 보조적인 역할을 하죠.”
박 안무가는 “유럽에는 고전이 아닌 창작 컨템포러리 발레도 쉽게 매진이 된다”며 “오페라도 옛날 그대로 하기보다 얼마나 색다르게 표현했느냐가 중요한데 그만큼 새롭고 창의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했다. 각각 우루과이국립발레단, 독일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단에 있었던 윤 대표와 박 안무가는 “국제적인 흐름에 따라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것과 접목해 더 독창적인 것을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품에서 무용수들이 갓의 테두리를 손으로 쓱 하고 훑거나 비스듬히 앉아 곰방대를 딱딱 두드리는 등 ‘도파민’적 요소도 과감하게 사용했다. 박 안무가는 유튜브나 K드라마를 보면서도 영감을 얻어 ‘포인트’가 되는 동작을 안무로 보일 수 있도록 고민한 결과물이라고 했다.
‘원조 맛집’, 지금 봐야할 이유

▲(사진) 발레 <갓(GAT)>의 박소연 안무가(왼쪽), 윤별 예술감독(오른쪽).
‘갓’을 처음 만들 때 정부의 창작지원금을 받았지만, 이걸로 부족해 윤별 대표가 그동안 모았던 돈을 전부 투자했고 그런 과감한 도전 덕에 지금에 이르게 됐다. 이런 제한적인 상황 때문에 스토리가 없이 ‘모자’만을 주제로 미니멀한 연출을 했지만, 오히려 뇌리에 박히는 순간들에 집중했다. 그 덕분에 무용계를 넘어 처음 발레 작품을 접하는 2030 관객 비중이 높다.
윤별 대표는 “’블랙 앤 화이트’를 할 땐 ‘저희는 ‘갓’만 하는 발레단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 이번엔 ‘그래도 저희는 ‘갓’을 제일 잘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했다.
“’갓’을 하는 무용수들이 대부분 창단 멤버이고 지금의 무용수를 기준으로 만든 작품이에요. 앞으로 공연 횟수가 더 많아지고 정형화되기 전, ‘원조 맛집’이자 가장 마스터피스인 순간이 바로 지금입니다.”
‘갓’ 시즌 투어때 윤별발레컴퍼니는 다른 공연을 일절 잡지 않는다고 한다. 연습실에 출근해 갓을 쓰고, 연습하고, 갓을 벗고 퇴근하는 것이 요즘의 일상이다. 젊은 발레단의 열정과 절실함이 묻어 있는 작품이라는 이야기.
박 안무가는 “이 작품에서 특히 처음 발레를 접하는 분이 많았고 ‘이렇게 발레가 멋있는 줄 몰랐다’거나, ‘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보러 오고 싶다’는 반응이 제일 기뻤다”며 이번 공연에도 그런 관객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윤별발레컴퍼니의 슬로건은 ‘얼마나 많이 보았느냐 보다 얼마나 깊이 보았느냐’. 그냥 유명해서 보러 오는 작품이 아닌, 와서 보고 무언가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되기를 바라며. 윤 대표, 박 안무가와 발레단원들은 이날도 땀을 흘리며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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