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스웨덴 왕립음악원 초청으로 비르기트 닐손상(Birgit Nilsson Prize) 시상식에 다녀왔다. 스웨덴의 전설적 소프라노 닐손이 사재를 헌납해 만든 상으로, 3년에 한 번 100만 달러의 상금으로 클래식 음악의 성취를 조명한다. 행사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수상자의 이름만이 아니었다. 시상식은 물론 갈라 디너에서도 세계 주요 극장에서 활동하는 스웨덴 성악가들의 무대가 마련됐다. 무대는 스타 소프라노 닐손을 기리는 데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이미 자리 잡은 중견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신예 성악가의 공연을 통해 성악 강국 스웨덴의 두터운 음악적 토대를 만끽할 수 있었다.

▲(사진) 2025년 비르기트 닐손상 시상식 ⓒBirgit Nilsson Foundation / Yanan Li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음악가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자리였지만 정작 그 무대가 증명한 것은 한 명의 전설이 아니라, 전설을 길러낸 구조였다. 빛나는 스타의 이름 뒤에 자리한 빈약한 한국 음악계의 현실을 떠올리는 계기도 됐다. 국내 클래식 음악계는 스타 시스템 의존도가 유독 높다. 해외 콩쿠르 입상,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경력, 유명 공연장 데뷔 이력은 곧 흥행의 언어가 된다. 제작비와 대관료가 상승하고 후원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기획자들이 검증된 이름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구조가 반복될수록 소수의 음악가만 무대에 서게 되고, 프로그램은 익숙한 레퍼토리로 제한된다. 인기 협주곡과 익숙한 아리아가 시즌을 채우는 동안 새로운 기획은 설 자리를 잃는다. 지나친 스타 편중은 공연장의 관람 매너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협연자로 나선 스타 연주자의 순서가 끝나기가 무섭게 메인 프로그램인 교향곡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객석을 떠나는 관객들의 모습이 목격되곤 한다. 음악 전체를 조망하기보다 특정 연주자에게만 몰입한 팬덤이 견고해질수록 공연은 작품이 아니라 스타를 소비하는 자리로 변한다.
잠재력 있는 음악가들이 무대 경험을 쌓을 기회가 줄어드는 것도 스타 시스템의 그림자다. 핀란드가 지휘 강국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는 신인 지휘자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무대 기회 덕분이다. 핀란드의 명문 음대 시벨리우스 음악원은 여러 오케스트라와 협력 관계를 맺어 학생들이 직접 지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성공보다 시도를 허락하는 교육 시스템 속에 음악가뿐 아니라 관객의 취향도 함께 자란다. 스타의 부각으로 단기간에 시장이 커지는 듯 보일 수 있지만 음악적 토대 전반의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에는 물음표가 남는다.

▲(왼쪽부터) 2025년 M 아티스트 바리톤 박주성 리사이틀 II, 2026년 M 아티스트 피아니스트 선율
그런 점에서 기초지방자치단체 문화재단인 마포문화재단의 기획이 눈에 띈다. M아티스트, M클래식 축제 등을 통해 다양한 음악가들에게 무대를 내어 주고 있다. 지난해 말 M아티스트였던 바리톤 박주성의 마지막 무대를 통해 가곡의 아름다움에 새삼 빠져들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연주자에게는 실험과 확장의 기회를 제공하고, 관객에게는 새로운 취향에 눈뜰 수 있게 해 준 시간이었다.
해외에 가지 않고 국내에서 경험할 수 있는 유수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과 세계적 스타의 리사이틀은 음악의 정점을 보여주는 면에서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나 음악을 지탱하는 것은 정점만이 아닌 여러 층위의 연주자가 보여주는 넓은 스펙트럼의 무대다. 소수의 빛나는 이름이 아니라 여러 목소리가 공존하는 구조 속에서 관객은 폭넓은 경험을 하고, 연주자는 장기적인 성장을 도모한다.
라이브 공연의 진짜 매력은 ‘최고’보다 단 한 번뿐인 경험이라는 데 있다. 그날 그 무대에서만 일어나는 미세한 균열과 변화, 연주자와 관객이 함께 만들어내는 공기는 어떤 완벽한 음반으로도 대체 불가능하다. 신진 음악가가 지역 공연장에서 들려주는 베토벤은 그날, 그 시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경험이다.
음악계의 토양은 관객 개개인 취향의 독립으로 완성된다. 이미 검증된 스타의 공연이 확인하는 과정이라면 새 얼굴이 꾸미는 공연에는 발견의 즐거움이 있다. 내가 먼저 알아본 연주자를 응원할 때 관객의 자부심은 스타의 팬덤보다 깊어진다. 비르기트 닐손상 시상식에서 만난 스웨덴 성악가들의 소식을 지금도 종종 찾아보며 그들이 더 큰 무대에 서는 소식에 쾌감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사진) 2025 제10회 M 클래식 축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M'. <2026 MAC모닝 콘서트>에서는 55인조 오케스트라 M을 결성하여 3~12월 공연을 올린다.
얼마 전 회사 동기가 암 수술이라는 생의 큰 고비를 넘겼다. 해외 유명 악단이나 스타 연주자의 공연이 있을 때마다 좌석 선택에 대한 조언을 구하려 종종 연락을 해 왔던 동기다. 수술 경과를 묻기 위해 연락했다가 최근에는 내한 공연의 명당을 찾는 대신 소박한 마티네 공연 일정을 뒤적이기 시작했다는 근황을 접했다. 그는 “매일 신문 1면 기사를 무엇으로 정하는지가 내 인생에 과연 어떤 의미인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며 “내 귀에 편안하면서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싸고 좋은 공연도 많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생의 본질 앞에 서면서 타인의 안목이나 기획사의 마케팅이 정해 준 스타가 아니라, 내 영혼을 위로하는 실질적인 선율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웨덴이 비르기트 닐손이라는 거인의 이름 아래 다양한 음악가를 함께 조명하듯, 우리에게도 스타 개인이 아닌 그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스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를 가능하게 하는 토양을 함께 만들어가는 일, 그것이 오늘날 클래식 음악계가 고민해야 할 방향일 것이다. 스타는 필요하지만 스타만으로는 음악이 자라지 않는다. 결국 관객 스스로 선택한 무대가 가장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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