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 바깥의 삶도 궁금했던 피아니스트" 백혜선 피아니스트 인터뷰

  • 글. 매일경제신문 정주원 기자
  • INTERVIEW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동요 ‘고향의 봄’은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조국을 그리워하던 민족의 노래로 널리 불렸고,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정서를 깊이 품은 노래다. 1926년 이원수가 시를 짓고, 여기에 홍난파가 곡조를 붙였다. 그러나 이원수와 홍난파가 말년의 반민족 행위 훗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면서 음악가와 음악에 대한 역사적 평가엔 공과 과가 얽혀 들게 됐다. 복잡한 정치적 논쟁이 여전하지만, 그래도 약 100년의 세월 동안 한반도 안팎에서 이 노래가 실향민의 마음을 달래줬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선보이는 독주회 ‘고향을 향한 오마주’가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아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도 그 지점이다. 백혜선은 이번 공연에서 재미 작곡가 서주리에게 직접 의뢰한 피아노 소나타 2번 ‘봄’을 연주한다. 동요의 익숙한 선율을 모티브로 삼아 사계절의 이미지를 음악으로 형상화한 일종의 변주곡이다. “’고향의 봄’을 오마주해 옛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가슴을 울리는 곡으로 탄생했습니다. 친일파니 매국노니 하는 이야기들로 이 노래가 일제 때 가장 많이 불린 노래란 사실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잖아요. ‘고향’과 관련해 가장 잘 알려진 곡이니 들려드리고 싶어요.”

백혜선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이전에, 독립운동가 백남채 선생(1888-1950)의 손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조국을 되찾으려 했던 조부의 헌신을 듣고 자랐던 그는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건 음악회”라는 생각으로, 연주를 통해 역사를 기린다. 올해 초 독립기념관 홍보대사로 위촉된데다, 1921년 3.1 만세운동의 거점이었던 뉴욕 한인교회 독립운동기념관 대표이사까지 맡은 터라 ‘광복 80주년’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도 했다. “어떤 젊은이에겐 더 이상 광복절이 아무런 느낌을 주지 않을 수도 있죠. 그래도 우리에게 이런 역사가 있었다는 걸 살펴보는 것, 역사를 역사로 받아들이는 기회가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에게 ‘고향’은 어떤 이미지일까. 태어난 곳은 대한민국 대구지만, 세계를 유랑하는 음악가의 삶은 이방인의 숙명이었다. 초등학생 때 수영선수를 꿈꾸기도 했지만 피아노로 전공하며 14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94년 29세의 나이로 한국인 최초의 차이콥스키 콩쿠르 입상(1위 없는 3위) 성적을 거두기까지, 피아노를 포기하고 전화회사 영업사원이 됐던 좌절의 시기도 있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직후엔 최연소 서울대 음대 교수로 취임했지만, 10년 만에 다시 미국으로 떠나 경력을 새로 써내려 갔다. 이혼 후 어린 아들딸을 건사하며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시기다. 지금은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NEC) 피아노 학과장으로서 세계적 피아니스트를 양성하는 백혜선은 “오히려 여러 아픔을 겪어봤기에 (학생들에게) 더 많은 얘기를 해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고 말한다.

백혜선의 가르침에서도 음악과 피아노보다 삶이 앞선다. 피아니스트일 뿐 아니라 여성이자 엄마, 교육자로서 환갑을 맞은 올해 그의 화두는 후배들의 앞날을 헤아리고 한 시대를 위한 본보기가 되는 것. 그는 “꼭 피아노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인생을 먼저 가본 선배로서 보여줘야 한다”며 “여성 연주자로서, 인생을 먼저 가본 선배로서 어떤 롤모델이 될 것인가, 다음 세대를 위해 내가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 생각하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예컨대 그의 레슨에선 악보 외에 ‘책’이 중요하다. 학생을 만나면 먼저 ‘책 읽어?’라는 질문을 던진다. 스승 러셀 셔먼(1930~2023)에게서도 그렇게 배웠고, 가르침을 실천하며 전수한다. 올해 프랑스 롱티보 콩쿠르에서 우승한 열일곱 제자 김세현도, 자신의 아들과 딸도 그렇게 가르쳐 NEC와 하버드대 복수 학위 과정을 밟게 했다. 백혜선은 “NEC에서도 학생들과 시 읽고 토론하는 수업을 할 것”이라며 “그런 과정이 없으면 내면이 메말라 표현할 수가 없게 된다”고 했다.



“인간의 거의 모든 활동이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잖아요. 그런 시대에 예술가는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기계를 이용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적인 감각과 취향, 표현은 중요해요. 각박해질수록 사람들 마음을 두드리는 역할이 필요하죠. 급변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같이 성숙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길을 찾아야 하는 1세대예요. 거기에 여성이자 선배로서 헌신하고 싶어요.”

연주자로서의 백혜선은 잠시 이런 고민을 비워내고 연주를 신선하게 유지하는 데 몰두한다. “이제는 뭘 듣고, 뭘 해야 하는지 아는 나이니까, 채우기보단 다 버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내 마음을 보호할 공간도 필요해요. 연주 말고도 해야 할 일, 관심 가는 일이 많지만, 제 나름대로 바쁜 마음을 비워내는 시간을 가져요. 연주를 앞두고 있을 땐 아무도 안 만나죠. 음악가에겐 그렇게 자신만의 보호막이 필요해요.”

비워내고 덜어낸 백혜선이 이번 연주회에서 들려줄 곡은 서주리의 ‘봄’ 외에도 더 있다. 베토벤이 전쟁 중 조국과 벗에 대한 마음을 담았던 소나타 26번 ‘고별’, 버르토크가 헝가리 민속 음악을 접목해 만든 소나타 80번, 슈만이 자신의 연인이자 마음의 안식처였던 클라라를 떠올리며 쓴 다장조 환상곡 17번 등이다. 특히 마지막 곡인 슈만 환상곡은 통상 연주회에서 박수갈채를 이끌어내기 쉬운 화려한 곡과는 거리가 멀다. 앞으로 이어질 삶을 떠올리게 하며 조용히 끝을 맺는다. 백혜선은 “이 부분을 잘 마무리 하느냐에 연주회의 성패가 달렸다”며 웃어 보였다. 이제, 백혜선이 손끝에서 그려낼 추억과 여운으로 마음을 가득 채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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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정보

제10회 M 클래식 축제
로맨틱 리사이틀 #3. <피아니스트 백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