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도전, 자유, 인내, 그리고 감사 소프라노 박혜상 인터뷰
이탈리아와 스페인 음악의 차이를 설명하던 그가 갑자기 “O mio babbino caro~”라며 낭랑한 소리를 내었다. 푸치니 오페라 <잔니 스키키>에서 주인공 라우레타가 아버지에게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애원하며 부르는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의 도입부다. 목소리를 가다듬을 틈도 없었다. 그의 청아한 소리가 퍼지자, 작은 두세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 이탈리아의 콘서트홀로 바뀌었다.
네트렙코 이후 세대를 대표하는
“밝고 맑은 목소리와 인상적인 콜로라투라 기교”(The New York Times), “애쓰지 않은 듯하면서도 빛나는 노래”(The Times), “순수한 기쁨과 흥분을 담은 빛나는 음색”(OperaWire). 세계 유수 언론들이 주목한 목소리의 주인공 소프라노 박혜상. 단순한 기교를 넘어 음악 안에 진정한 감정을 불어넣으며, 세계 최정상의 클래식 레이블 도이체 그라모폰의 전속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그가 오는 가을 국내 팬들과 만난다. 공연에 앞서, 여름의 열기가 뜨겁던 어느 날, 그를 만났다.
귀국 이틀째. 긴 여정을 마치고 한국에 잠시 들른 상태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 그는 영국 런던과 에든버러를 오가며 바쁜 무대를 소화했다. 세계적인 실력을 공인받았다는 의미의 BBC 프롬스에 데뷔했고,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도 모차르트 오페라 <티토의 자비>를 선보였다. 숨 가쁜 일정 속에서도 그는 피곤함 대신 설레는 에너지를 풍겼다.
“BBC 프롬스 무대는 성악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대예요. 관객들이 서서 음악을 즐기고, 춤추고, 웃는 모습이 너무 신선했죠. 클래식이 딱딱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실감했어요.” BBC 프롬스가 특별한 무대라면,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EIF)은 박혜상에게 각별한 무대다. 지난해 <코시 판 투테>로 첫 데뷔를 한 이후 매년 초청을 받고 있고, 내년에도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 무대에 설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휘자 맥심(Maxim)과의 협업을 이야기하며 맥심이 지휘하는 음악은 “마치 모차르트가 살아 돌아온 듯한 느낌을 준다”라며 한참을 칭찬했다.
낯선 곳, 낯선 언어, 그러나 자유
영국과 미국을 오가는 숨 가쁜 일정 속에서 잠시 귀국한 그를 만난 건,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리사이틀 인터뷰 때문. 그는 올해 10주년을 맞는 마포문화재단 M 클래식 축제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리사이틀 무대를 가진다. 이번 무대가 남다른 건, 리사이틀의 모든 프로그램을 그가 전적으로 기획해서다. 이번 무대를 그는 “도전의 시작점”이라 표현했다. 실제로 이번 리사이틀의 곡들은 대부분 국내 무대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다.
“저한테도 낯선 곡이에요. 심지어 불러본 적 없는 곡도 있어요. 새롭게 공부해야 하는 레퍼토리가 많아서 저에게도 큰 도전이에요. 그런데 마포에서라면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낯설어서 더 도전하고 싶다”라고.
이번 무대를 위해 그는 스페인 작곡가들의 곡을 중심으로, 민속적 리듬과 정서를 품은 작품들을 선택했다. 스페인 음악이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그는 스페인 음악에 한국 가곡을 연상시키는 힘이 있다고 한다. “스페인 곡은 자유로워요. 때로는 거칠고,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이 있죠. 그런 면에서 한국 가곡의 정서와도 닮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는 이탈리아 오페라와의 차이를 언급하며, 정교한 발성과 규율이 요구되는 이탈리아와 달리 스페인 음악은 훨씬 자유롭고 인간적인 감정을 담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탈리아 벨칸토는 정말 완벽한 테크닉과 호흡이 필요해요. 삶을 갈아 넣어야 한다고 할까요. 하지만 스페인 음악은 발성의 작은 어긋남조차 매력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자유롭죠. 저에게는 그 자유로움이 큰 해방감을 줘요.”
자유롭다면, 노래도 더 편하게 부를 수 있을까? 대답은 ’노‘. 스페인은 지역에 따라 카스티야어(스페인어),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바스크어 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다. 자연스럽게 곡마다 구사해야 하는 언어도 다르다. “언어만 다른 게 아니라 억양도 다르거든요. 그래서 스페인계 친구들에게 직접 발음을 녹음 받아 따라 하면서 연습하고 있어요.” 공연을 위해 그는 곡 하나하나의 배경을 직접 조사하고, 현지 출신 성악가들에게 발음을 배우며 준비하고 있다. 이런 세밀한 준비가 무대를 더 진실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한편, 함께 무대에 오르는 피아니스트 안드레스 사레를 초청한 이유도 그런 맥락 위에서 설명할 수 있다. “안드레스 사례는 멕시코 출신 피아니스트인데, 특히 스페인과 라틴 레퍼토리에 대한 이해가 깊은 마에스트로예요. 이번 공연만을 위해 멕시코에서 날아오죠. 저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무대입니다.”
목소리, 테크닉, 뮤지컬리티, 그리고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익숙하고 안온한 길을 두고, 낯설고 고된 길을 택했을까? 어쩌면, 친숙한 음악을 들려주는 게 그에게도 관객에게도 편안할 수 있을 텐데. 이 질문에 그는, 앞서 나눈 대화보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단호하게 답한다. “제가 제일 경계하는 것 중 하나가 쉬운 프로그램으로 대충 때우는 거예요. 그거만큼 제 영혼을 깎아 먹는 일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시간만 때우는 공연이라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프로그램 짤 때도 조금 더 엄격해지려고 하는 것 같아요.”
박혜상에게 무대는 언제나 도전의 연속이지만, 그 도전은 단순히 새로운 곡이나 낯선 언어에만 있지 않다. 오페라 무대에서는 특히 관계와 협업의 무게가 무겁다. 그는 솔직히 고백한다. “열심히 준비해도 저와 다른 생각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걸 조율하는 데 굉장히 많은 에너지가 소모돼요. 결국은 같은 목표, 좋은 공연을 만들기 위한 거지만 그 중간점을 찾는 게 쉽지 않아요.”
타고난 목소리, 완벽한 테크닉, 그리고 마음을 울리는 음악적 감수성. 그는 그중 두 가지만 있어도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다고 한다. “세 가지 중 두 가지만 있어도 성공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진정한 레전드가 되려면 또 다른 뭔가가 필요하죠. 영감과 관계를 맺는 능력이에요” 오페라라는 공동작업에선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휘자와 연출가, 그리고 동료와의 관계는 음악적 완성도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렇기에 그는 ’노래 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잘 안다. 관계 속에서 오는 갈등과 타협, 그 속에서 자신을 조율하는 법 역시 음악가의 길에 포함된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박혜상에게 또 하나의 도전이 된다. 그는 완벽주의자라는 질문에 웃으며 답한다. “저는 제가 부족한 걸 굉장히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부족하기 때문에 도전할 게 있는 거죠.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계속 도전할 일이 있다는 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조합 아닌가요?”
인내 또한 그의 음악관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노래하는 몸은 섬세하다. 근육과 호흡, 작은 긴장이 소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하루에 15분 발성을 했으면 30분은 쉬었다가 또 15분 해야 해요. 기다릴 줄 알아야 해요.” 이 기다림은 단순히 훈련법을 넘어,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인내와 기다림 속에서 그는 노래를 배우고, 동시에 삶을 배워간다.
감사로 완성되는 목소리
그의 말처럼 박혜상은 부족함을 즐기며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그 도전은 새로운 언어와 낯선 곡을 넘어, 음악을 삶의 방식으로 삼으려는 몸부림이다. 올가을, 마포에서 시작될 그의 무대는 단순한 리사이틀이 아니라 한 예술가가 자기 삶을 노래로 증명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노래는 목소리, 테크닉, 뮤지컬리티 세 가지 기둥 위에 세워진다. 그러나 박혜상은 그 너머의 힘을 강조한다. 바로 감사다. 인터뷰의 끝에서 그는 음악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목소리, 완벽한 테크닉, 그리고 마음을 울리는 음악적 감수성, 모두가 중요하지만, 그 모든 걸 통합하는 건 감사함이라고 생각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노래할 때 비로소 진정한 울림이 생기죠.”
감사는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음악을 대하는 태도다. 그리고 종교적 고백이자 예술가의 길을 지탱하는 뿌리다. 음악이란 결국 혼자의 힘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목소리와 기회, 함께 무대를 만들어주는 동료와 관객이 있기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말한다. “좋은 무대를 허락받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고. 그래서 그의 노래에는 단순한 기교를 넘어, 듣는 이를 울리는 울림이 스며드는 게 아닐까.
도전과 타협, 인내와 감사. 어쩌면 이는 그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만은 아닌 듯하다. 그가 삶을 대하는 자세 또한 그렇다. 그의 대답에서 그 흔적을 찾았다. “노래를 잘하려는 목표는 인생을 잘 살겠다는 목표와 비슷해요.” 결국, 무대는 하나의 노래가 아니라, 삶 자체를 연주하는 과정이니까. 그래서 그의 노래는 끝나지 않는 게 아닐까. 무대가 닫힌 후에도, 관객의 마음속에 울림으로 남아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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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외홍보작성일 2025-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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