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한국적 창작발레 위한 30년, 순수한 몸짓으로 빛나다 - 2025 M발레시리즈 [순수의 시대] 공연 리뷰
한국에서 발레가 이토록 활기를 띤 적이 있었을까. 지난 5월 둘째 주말, 발레 팬들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국립발레단은 강수진 단장의 현역 시절 대표작인 존 노이마이어 안무의 드라마 발레 ‘카멜리아 레이디’를 아시아 초연으로 선보였다. ‘컨템포러리 발레단’을 지향하는 서울시발레단은 스웨덴 출신 안무가 요한 잉거의 ‘워킹 매드’와 ‘블리스’를 아시아 초연해 이목을 끌었다.
주목할 발레 공연이 하나 더 있었다. 서울발레시어터가 창단 30주년을 맞아 선보인 창작발레 공연 ‘순수의 시대’다. 지난 9~10일 마포아트센터 아트홀 맥에서 열린 이 공연은 서울발레시어터가 30년간 쌓아온 창작 역량과 정체성을 집약해 보여주는 자리였다.
서울발레시어터는 1995년 창단한 뒤 ‘대한민국 발레의 창작과 대중화’라는 모토로 100여 편이 넘는 창작발레 레퍼토리를 제작해온 민간 발레단이다. 지난해부터 마포문화재단의 공연장상주단체로 활동하며 발레 팬은 물론 마포구 지역 주민들을 위한 문화 향유 기회를 넓히고 있다.
‘순수의 시대’는 총 다섯 편의 창작 작품으로 구성됐다. 최진수 단장 겸 예술감독이 안무한 ‘더 바이올렛’(The Violet)이 공연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고, 서울발레시어터 명예 예술감독인 안무가 제임스 전의 ‘1×1=?’, 무용단 반의 대표인 안무가 유선식의 ‘또 다른 물결’, 미국 애틀랜타 발레단 출신으로 현재 유미크댄스 예술감독인 안무가 김유미의 ‘피에스타’(Fiesta),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겸 안무가 강효형의 ‘몰레큘러 모션’(Molecular Motion)이 무대에 올랐다.
이 중에 단연 눈길을 끈 것은 강효형 안무가의 ‘몰레큘러 모션’이다. 제목 그대로 ‘분자 운동’을 주제로 삼아 고체에서 액체, 기체로 변화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무용수들의 움직임으로 시각화한 작품이다. 명확한 작품 콘셉트와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안무에서 창작발레 특유의 참신함이 돋보였다.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제목과 달리 매우 직관적인 작품이었다. 공연은 미묘한 긴장감 속에서 시작한다. 무대 위에 선 발레리나들은 정지된 자세에서 작은 몸짓만을 펼친다. 답답하기까지 할 정도로 긴장된 이들의 춤은 외부 에너지를 상징하는 2명의 발레리노가 등장하면서 서서히 풀려간다. 직선 중심의 동작은 곡선으로 바뀌고, 움직임은 점점 더 자유로워진다. 마침내 무용수들은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극장을 활보한다. 그 순간, 극장 안은 해방의 에너지가 넘쳐난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완성도 높은 안무는 물론, 전통과 현대, 음악과 몸짓의 조화를 이뤄낸 창작 방식 때문이다. 강효형 안무가는 한국 전통음악을 토대로 창작발레를 꾸준히 선보여 왔다. 안무라고 이름을 알린 ‘요동치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음악을 활용한 ‘허난설헌_수월경화’ 등을 통해 독창적인 한국적 발레를 구현해왔다. 이번 작품에선 밴드 잠비나이의 멤버이자 거문고 연주자인 심은용의 음악 ‘모션’을 활용했다. 분자의 움직임을 연상케 하는 음악이 안무의 영감을 제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전통음악을 이용한 창작발레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창작발레는 종종 어렵고 난해하다는 인식을 받는다. 서사가 명확한 고전발레와 달리 창작발레는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이다. 음악과 움직임을 통해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며 관객에게 감각적인 해방의 경험을 선사한 ‘몰레큘러 모션’은 이러한 창작발레의 매력을 충분히 느끼게 했다. 예술은 거창한 주제를 다루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리고 대사 하나 없이 몸짓만으로도 보는 이의 새로운 감정과 감각을 일깨울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줬다. 이는 ‘순수의 시대’라는 공연 제목과도 절묘하게 맞닿아 있었다.
다른 작품들도 창작발레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임스 전이 안무한 ‘1×1=?’는 다프트 펑크를 비롯한 일렉트로닉 음악에 맞춰 유쾌하고 경쾌한 무대를 펼쳤다. 유선식이 안무한 ‘또 다른 물결’은 비발디 음악에 맞춰 일렁이는 바다의 물결처럼 흐르는 몸짓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김유미 안무작 ‘피에스타’는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를 배경으로 제목처럼 축제와 같은 폭발적인 에너지와 열정이 돋보이는 무대를 만들어냈다.
15세기 이탈리아 귀족사회에서 시작된 발레는 16세기 프랑스로 건너가 루이 14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귀족의 전유물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즐기는 대중적인 예술로 진화하고 있다. 최진수 단장이 안무한 ‘더 바이올렛’은 이러한 발레의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연결하고 있었다. ‘순수의 시대’라는 제목은 발레를 향유하는 이들이 달라지더라도 발레가 지닌 ‘춤’ 본연의 순수함은 변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한국적 발레를 위해 30년을 달려온 서울발레시어터의 노력은 ‘창작발레의 명가’라는 이름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말보다 깊은 감정, 몸짓 하나로 관객의 감각을 깨우는 무대를 통해 발레가 가진 ‘순수함’의 본질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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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외홍보작성일 202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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