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갓>과 ‘스테이지 파이터’가 우리의 전부는 아니다
연말에는 <호두까기인형>이라는 게 일종의 공식처럼 자리 잡았지만, 올해 마포문화재단은 특별한 무대를 준비 중이다. 2025 M 송년시리즈 발레 갈라 <블랙 앤 화이트>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인사처럼 단순한 축하가 아닌, 지금 한국 발레가 서 있는 두 극점의 풍경을 동시에 펼쳐 보이는 무대다.
이 무대의 중심에는 2022년 창단 이후 파격적인 창작으로 주목받아온 윤별발레컴퍼니가 있다. 이번 갈라는 ‘잘 알려진 연말 발레’라는 안전한 공식을 과감히 벗어 던진다. 가장 흥행이 보장된 레퍼토리 <갓>을 내려놓고, 대신 신작 네 편과 고전의 재해석을 전면에 내세웠다. ‘블랙’과 ‘화이트’라는 두 색 아래 전통과 창작, 고전과 현대, 익숙함과 낯섦의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 준비 중이다.
<갓> 뒤에 숨고 싶지 않아
“<갓>을 하면 연습 시간도 줄고, 홍보도 쉽고, 흥행도 더 잘 되겠죠. 그런데 그러면 우리가 <갓>밖에 못하는 컴퍼니로 보일 것 같았어요.”
윤별 대표에게 제일 처음 물었던 질문은 왜 <갓>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갓>은 윤별발레컴퍼니를 세상에 각인시킨 대표작이자, 전 회차 매진 신화를 쓴 흥행작이다. 갈라 무대에 넣기만 해도 티켓 판매는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러기까지 그는 오래 망설였다고 한다. 그의 우려가 단순히 흥행의 문제만이 아니었던 듯하다.
“<갓>만 할 수 있는 컴퍼니로 보이는 게 제일 두려웠다”는 고백에는 신생 발레단 대표로서의 불안과 책임이 동시에 묻어나는 듯했다. 반복되는 성공은 안정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다음 걸음을 가로막는 그림자가 되기도 하니까. 그래서 그는 이번 송년 갈라를 <갓>에서 벗어나 윤별발레컴퍼니의 폭을 증명하는 무대로 설정했다. 흥행 공식을 거부한 대신, 컴퍼니의 미래를 향한 도박에 가깝다.
<갓> 을 벗고 택한 블랙 앤 화이트
“처음엔 송년 갈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블랙 앤 화이트’라는 콘셉트가 더해지면서, 송년, 갈라, ‘블랙 앤 화이트’가 동시에 성립해야 했어요. 교집합이 너무 많아지니까, 고를 수 있는 작품이 확 줄어들더라고요.”
’블랙 앤 화이트’. 얼핏 보기엔 단순해 보이지만, 이 콘셉트가 더해지며 갈라로서의 자유로움이 제한되었고, 기존의 작품만으로 꾸릴 수가 없게 되었다. 때문에 이번 공연을 위해 신작 4편을 새로 만들었다. 여기에 재안무작 2편을 더하면, 무려 6편이 새로운 작품인 셈이다. 작품을 구상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지킨 원칙 중 하나는 구성의 균형이었다. 윤별은 “보통 갈라 공연은 듀엣 중심의 ‘콩쿠르형 갈라‘로 구성되는데, 그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두 명, 세 명, 여섯 명, 열 명이 등장하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어요.”
'블랙 앤 화이트‘는 작품의 전체적 인상으로 구분했다. <백조의 호수>의 흑조와 백조는 자연스럽게 두 색의 기준점이 되었다. 외의 작품을 두고 음악, 무용수의 움직임, 작품이 주는 인상까지 모두 ‘검은 쪽인가, 흰 쪽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했다. 그 결과 ‘블랙’과 ‘화이트’는 4편씩 균형 맞춰진 구조가 되었다.
블랙과 화이트의 극적 대비
이번 갈라는 총 8개 이상의 레퍼토리가 ‘블랙’과 ‘화이트’ 두 섹션으로 나뉘어 구성된다. (매일 8편을 선보이는데 6편이 중복이고 2편은 교차로 선보인다) 고전 발레의 정수로 꼽히는 <백조의 호수>, <돈키호테>의 파드되부터, 창작 발레와 재해석 작품까지 한 무대에서 교차한다.
‘블랙’ 섹션은 <백조의 호수> ‘흑조 그랑 파드시스’로 문을 연다. 이 작품은 박소연 특유의 재해석이 더해진 군무로, 기존의 흑조 코다 음악을 남성 군무 중심의 구성으로 뒤집으며 고전 속 권력 구조와 시선을 전환한다. 또한 <호두까기인형(Nut Cracker)>을 패러디 한, 그리고 윤별이 2014년 안무한 <세 얼간이>가 공연된다. 그리고 이은수의 신작 <듀엣 인 프렐류드>와 박소연의 <루나 세레나데>가 교차로 공연된다.
‘화이트’ 섹션은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와 지크프리트의 파드되(12월 10일)와 <신데렐라> 그랑 파드되(12월 11일)가 교차로 선보인다. 이어 김유찬이 조지 거슈윈의 곡에서 모티프를 얻어 창작한 신작 <랩소디 인 블루>, 박소연의 신작 <겨울 나그네>가 공연된다. 공연의 대미는 <돈키호테> 그랑 파드되가 장식한다. (12월 11일 <돈키호테> 그랑 파드되는 윤별과 박소연이 꾸밀 예정이다.)
이처럼 <블랙 앤 화이트>는 원형 그대로의 고전, 현대적으로 변주한 고저, 그리고 새로운 창작이라는 흐름을 무대 위에서 한 번에 보여주는, 일종의 발레 스펙트럼 지도와도 같다.
고전의 재해석
“저는 안무를 할 때, 관객에게 설득이 되는가를 많이 생각하는 편인 것 같아요. 작품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어도, 제목마저 모르더라도, 작품을 보고 ‘아! 이런 작품인가보다’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게 포인트 같아요.”
이번 <블랙 앤 화이트>의 가장 큰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신작 네 편의 초연이다. 그 중심에 <갓>으로 이름을 알린 안무가 박소연이 있다. 이번 무대에서 그는 <낫 크랙커(Not Cracker)>와 <겨울나그네(Winterreise)> 두 편의 신작을 선보인다. 박소연은 이번 작업을 ”결코 가볍지 않은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낫 크랙커(Not Cracker)>는 <호두까기 인형>의 행진곡을 정면으로 비튼 작품이다. 박소연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아무 의심 없이 호두까기 인형을 떠올리는데, 그 상투적인 관성을 깨고 싶었다”고 말한다. 인형들이 스스로 호두를 ‘까게’ 강요당하는 존재라면, 그 노동은 축제가 아니라 억압일 수도 있다는 질문에서 이 작품은 출발했다. “처음엔 완전히 인형처럼, 고장 난 것처럼 움직이다가, 마지막에는 자기 의지로 스스로 깨부수는 움직임으로 끝내고 싶었어요.” 이 과정에서 무용수의 몸은 점점 더 인간화되고, 억눌린 감정은 해방된다.
반면 <겨울나그네(Winterreise)>는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 중 ‘보리수’에서 출발한다. 박소연은 이 음악에서 검은 외로움이 아닌, 하얀 고독의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했다. “눈밭을 혼자 걸어오는 나그네의 모습이 먼저 그려졌어요.” 희고 고요한 무대 위에서 김유찬의 솔로가 펼쳐지는 이 작품은 이번 갈라에서 가장 서정적인 순간이 될 전망이다.
박소연은 “안무는 결국 관객을 설득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제목이나 설명을 읽지 않아도, 몸의 흐름과 음악만으로 장면이 그려져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이번 신작 전반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
'간절함'으로 만들어진 집단
“여기 있는 친구들은 항상 ‘이번이 마지막 무대일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준비해요.”
윤별발레컴퍼니는 코로나 이후 무대에서 밀려난 무용수들이 하나둘 갈 곳을 잃던 시기. 은퇴를 고민하는 무용수들을 위해 창단한 발레단이다. 다만 이런 팬데믹에 의한 어려움 외에도, 단원 중에는 부상이나 기회 부족으로 좌절을 겪은 이들이 많다. 때문에 윤별발레컴퍼니의 무대에는 늘 절박함과 간절함이 밀도 있게 스며 있다.
이번 <블랙 앤 화이트>에서 윤별이 전면에 나서기보다 신작 안무가들을 중심에 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윤별은 스스로의 춤 욕심을 내려놓으며, 더 많은 기회를 무용수와 안무가에게 넘겨주고 있다. “제가 (안무나 출연을) 안 하면, 다른 누가 할 수 있잖아요.” 그는 무대 위의 주인공보다, 이 무대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만드는 사람이 되길 택했다.
<갓>으로 유명세를 얻기는 했지만, 윤별발레컴퍼니 무대에는 생존의 에너지가 흐른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이번 송년 갈라에서도 가장 강하게 발산될 것으로 보인다.
이 무대를 봐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
<블랙 앤 화이트>를 봐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출연자에 있다. 이 무대에는 지금 가장 주목받는 젊은 남성 무용수들이 함께 선다. 엠넷 ‘스테이지 파이터’를 통해 얼굴을 알린 ‘섹시놀부’ 강경호, ‘독기유찬’ 김유찬, ‘프린스욱’ 정성욱이 출연한다. 사실 이들의 이름값으로도 이미 많은 티켓이 소진되었을 것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선보이기 전에 이미 우리 전통의 멋을 살린 <갓>으로 시대의 흐름을 먼저 읽어내는 감각을 보여준 윤별발레컴퍼니. 거기에 ‘스테이지 파이터’를 통해 실력을 입증한 발레리노까지, 이미 <블랙 앤 화이트>를 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거기 더해 <블랙 앤 화이트>는 단순한 연말의 감상용 발레가 아니라, 윤별발레컴퍼니의 저력을 보이는 동시에, <갓>이후 새로운 신작의 가능성을 선보이는 자리가 될 것이다.
검은 무대 위에 남는 하얀 발자국처럼, 이 송년의 갈라는 2025년의 끝이 아니라 2026년의 시작에 더 가까운 무대다. 발레를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그리고 지금 한국 창작 발레의 좌표를 직접 확인하고 싶다면, 이 무대를 건너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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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외홍보작성일 202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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